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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조건이 바뀌었을 뿐인데 ‘거래정지’라고요?” : 표시값(라벨값) 하나로 갈린 공공조달 제재의 운명

  • 18시간 전
  • 11분 분량

들어가며..

이 글은 실제 법원에서 다루어진 행정소송 판례(서울고등법원-2024누54777)의 내용을 바탕으로, 공공조달 다수공급자계약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행정청의 제재 처분과 관련된 핵심 쟁점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후의 입법으로 법이 변경되거나 새로운 대법원 판례가 선고되어 법리가 변경된 경우에는 이 글의 내용이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안의 법리를 이해하고 실무적인 대응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참고 용도로만 활용하여야 합니다.


제1장. 사건의 발단: 다수공급자계약과 기술 표준의 변경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학교와 같은 공공기관은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때 주로 국가 조달 시스템을 이용합니다. 이 시스템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다수공급자계약' 제도입니다. 다수공급자계약이란 국가기관이 일정한 품질 요건을 갖춘 여러 업체의 제품을 종합쇼핑몰에 등록해 두고, 수요기관이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여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냉동공조기기 제조업을 영위하는 주식회사 A(이하 'A사')는 201X년경 조달청과 다수공급자계약을 체결하여 공공기관 등에 공기순환기를 공급해 왔습니다. A사는 202X년경 조달청과 바닥설치형 무덕트 폐열회수형 공기순환기에 대한 납품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 A사는 종전의 국가기술표준(이하 '종전 표준')에 따라 '기외정압 0Pa(파스칼)' 상태에서 시험한 성적서를 제출했습니다. 해당 성적서에 기재된 A사 제품의 표시값은 냉방 에너지계수 약 12.0, 난방 에너지계수 약 17.0, 소음 약 54dB이었습니다.

이후 공기순환기의 시험방법에 관한 국가기술표준이 개정(이하 '개정 표준')되었습니다. 핵심적인 변경 사항은 초기 기외정압 조건을 기존 0Pa에서 50Pa 이상으로 대폭 상향한 것입니다. 기외정압이란 기계가 공기를 내보낼 때 필터 등 외부 구조물에 의해 발생하는 저항 압력을 뜻합니다. 기외정압이 증가하면 일정 풍량을 유지하기 위해 팬 모터의 출력이 증가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에너지계수는 감소하고 소음은 증가하게 됩니다.

일상적인 용어로 비유하자면, 과거의 표준은 선풍기를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넓은 거실에서 틀어놓고 성능을 측정하는 '기외정압 0'의 매우 쾌적한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개정된 새로운 표준은 선풍기 앞에 촘촘한 마스크를 씌워놓고 바람이 얼마나 잘 빠져나가는지를 측정하는 '기외정압 50' 이상의 매우 가혹한 조건이었습니다. 마스크를 씌운 상태에서 일정량의 바람을 밀어내려면 기계의 모터는 훨씬 더 강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 결과 전기를 더 많이 소모하게 되어 에너지 효율(에너지계수)은 필연적으로 떨어지게 되고, 모터가 강하게 도는 만큼 소음은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는 물리적 법칙이 작용합니다.

A사는 기술 표준이 개정된 이후인 특정 시점에 조달청과 제품의 설치비 단가 등을 인상하는 내용의 수정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정계약서의 규격서에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문구, 즉 "본 제품은 개정된 최신 국가기술표준을 따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A사는 이 계약을 갱신하는 과정에서, 가혹해진 새로운 시험 조건에 맞추어 제품의 스펙(표시값)을 다시 측정한 새로운 시험성적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과거 쾌적한 조건에서 측정되었던 우수한 수치가 적힌 기존의 성적서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A사의 숨통을 조이는 결정적인 올가미가 될 줄은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2장. 엇갈린 잣대: 가혹한 시험과 가혹한 행정처분

A사는 수요기관인 B 학교의 납품 요구에 따라 공기순환기 6대를 납품했습니다. 조달청은 전문검사기관인 D 기관에 이 물품들에 대한 품질 검사를 요청했습니다.

전문검사기관은 수정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개정된 최신 표준'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즉, 기계에 촘촘한 마스크를 씌운 것과 같은 가혹한 저항 조건(기외정압 50)을 설정하고 에너지 효율과 소음을 측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검사기관이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채점의 기준표로 삼은 것은, A사가 과거 아무런 저항이 없는 조건(기외정압 0)에서 받아 두었던 예전의 성적서 수치, 즉 제품에 기재된 '표시값'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쾌적한 조건에서 세운 최고 기록을, 극한의 악조건에서 달린 기록과 비교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검사 결과, 제품의 냉방 및 난방 에너지 효율은 과거 스펙 대비 약 87%에서 88% 수준으로 측정되어, 품질기준치인 '표시값의 90% 이상'이라는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미달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소음의 경우에도 과거 측정값이었던 약 54데시벨(dB)을 소폭 초과한 약 57데시벨로 측정되어 역시 기준치를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조달청의 대응은 기계적이고 단호했습니다. 조달청은 이러한 수치 미달을 근거로 A사의 제품에 '중결함(무거운 하자)'이 있다고 판정했습니다. 그리고 관련 물품구매계약 특수조건 및 조달사업법령에 따라 A사에게 무려 1개월 동안 나라장터 종합쇼핑몰에서의 거래를 전면 정지시키는 무거운 행정처분을 내렸습니다.

A사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회사의 매출 대부분이 조달청 쇼핑몰을 통해 발생하는데, 1개월간 거래가 막힌다는 것은 사실상 공장 가동을 멈추고 직원들의 급여를 걱정해야 하는 치명적인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게다가 거래정지 기록이 남게 되면 향후 다른 공공기관 입찰에 참여할 때도 감점을 받아 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A사는 "시험 조건이 완전히 가혹하게 바뀌었는데, 옛날의 유리한 잣대로 채점을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며 억울하다"며 조달청을 상대로 거래정지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제3장. 제1심 법원의 판단: 처분 적법 (원고 패소)

제1심 행정법원은 조달청의 거래정지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단하여 A사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제1심 재판부의 주요 판단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계약 문언에 따른 적법한 검사: 이 사건 규격서에 개정 표준을 따른다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D 기관이 개정 표준에 따라 기외정압 50Pa 조건에서 검사한 것은 정당합니다.

  2. 객관적 수치 미달: 제품의 성능이 규격 기준(표시값의 90% 이상 등)에 미달한 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므로 불합격 판정은 타당합니다.

  3. 확인시험(재시험) 절차 위반 없음: 조달물자 전문기관검사 업무규정에 따르면 확인시험을 위해서는 '동일한 생산 단위(로트, Lot)'에서 채취한 시료에 대한 타 공인기관의 시험 결과가 필요합니다. A사가 이의신청 당시 제출했던 과거 시험성적서나 타 모델의 인증서들은 이 사건 납품 물량과 동일한 로트의 물품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달청이 재시험을 거부한 것에 절차적 위법은 없습니다.


제4장. 제2심 법원의 판단: 처분 취소 (원고 승소)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은 제1심 판결을 취소하고, 조달청의 거래정지 처분을 취소하는 A사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가 판결을 뒤집은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바로 '비교 잣대의 불일치로 인한 논리적 모순'이었습니다. 재판부는 단순히 계약서의 문구에만 매몰되지 않고, 이 사건 기계가 작동하는 물리적 원리 그 자체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기외정압이 과거의 0 수준에서 새로운 50 수준으로 증가하면, 일정 풍량을 유지하기 위해 팬 모터의 출력이 증가해야 하고, 그에 따라 에너지계수가 감소하고 소음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고 명확히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판부는 조달청의 검사 방식이 근본적으로 타당성을 잃었다고 질타했습니다. 비록 계약이 개정된 최신 표준을 따르기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가혹해진 조건에서 테스트를 진행했다면 그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점(표시값) 역시 그 악조건에 맞게 새롭게 설정된 수치와 비교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쾌적한 조건에서 얻어낸 기존의 우수한 성적을 잣대 삼아, 악조건에서 뛴 결과를 불합격 처리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조달청의 계약 관리 태도에도 일침을 가했습니다. 만약 조달청이 진정으로 A사의 제품이 험난한 저항 조건 속에서도 과거의 쾌적한 조건과 동일한 뛰어난 수치를 발휘하기를 원했다면, 계약을 체결할 당시 그러한 내용을 명시적인 '특약'으로 정해두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혹은 기존 모델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새로운 성적서 제출을 계약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A사가 이 사건 처분의 사전 통지 단계에서부터 개정 표준에 따 른 재시험 기회를 부탁하였으나 조달청은 이러한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도 고려하였습니다. 조달청이 이러한 세밀한 검토와 합의 절차를 방기한 채, 뒤늦게 기업에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어 불합격 판정을 내린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구분

제2심 고등법원 재판부의 논리와 시각 (A사 승소)

기준 적용의 정당성

시험 조건(기외정압)이 불리하게 바뀌었는데, 과거의 쾌적한 조건에서 세운 수치(표시값)와 비교하여 불합격을 주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며 부당함.

행정청의 계약 관리

기준이 변경되었다면 조달청은 새로운 성적서 제출을 명확히 요구하거나, 특별한 합의(특약)를 했어야 함. 행정 편의주의적 일처리를 지적함.

결함의 판정 (중결함)

에너지 효율의 미미한 부족이나 3dB의 소음 초과가 기계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중결함'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

행정처분의 비례성

과거 무결점 납품 이력, 수요기관의 사용 지장 여부, 기업이 겪을 막대한 경영상 피해를 종합할 때, 거래정지 처분은 너무 가혹하여 재량권 일탈·남용임.


제5장. 핵심 쟁점 분석

이 글에서는 제2심 법원이 처분을 취소하면서 제시한 구체적인 법리적 근거와 핵심 쟁점을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합니다.

쟁점 1. 수치 미달이 법률상 '중결함'에 해당하는지 여부

조달물자 전문기관검사 업무규정상 '중결함'이란 물품의 실용성을 실질적으로 저하 시키고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예상되는 정도의 결함을 의미합니다. 재판부는 실제 측정된 수치를 분석했습니다. 개정 표준이 요구하는 최소 기준은 냉방 8.0, 난방 15.0 이상이었습니다. 이 사건 제품은 가혹해진 50Pa 조건에서도 냉방 효율이 약 10.5로 측정되어 최소 기준을 넉넉히 충족했고, 난방 효율은 약 14.7로 최소 기준에 불과 0.3 미달했습니다. 소음 역시 3dB을 초과하는 데 그쳤습니다. 법원은 이 정도의 미세한 수치 차이만으로는 제품의 실용성이 실질적으로 저하되었거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곤란한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쟁점 2. 행정법의 대원칙, '비례의 원칙'과 재량권의 일탈·남용

행정청의 제재 처분은 달성하려는 공익과 사인이 입는 불이익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비례의 원칙). 이는 쉽게 말해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워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원칙입니다. 행정청이 잘못을 저지른 국민이나 기업에게 제재를 가할 때는 그 잘못의 크기에 비례하는 적절한 수준의 제재를 가해야 하며, 공익을 달성하려는 목적에 비해 사인이 입게 되는 피해가 지나치게 참혹하다면 그 행정처분은 이른바 '재량권을 일탈하고 남용한 위법한 처분'으로 취소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법리입니다. 제2심 법원은 다음 일곱 가지 구체적 사정을 들어 이 사건 처분이 가혹하여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고 판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구체적인 사정들을 낱낱이 열거하며, 조달청의 1개월 거래정지 처분이 비례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가혹한 처분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첫째, A사는 과거 수년간 관할 조달청은 물론 전국의 여러 지방 조달청과 다수의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수많은 제품을 성실히 공급해 온 우수 기업이었습니다. 그 기나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품질 불합격 판정이나 징계를 받은 전력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성실한 과거 이력은 기업의 선의를 증명하는 강력한 정황 증거가 됩니다.


둘째, 사건의 전후 경위를 살펴볼 때, A사가 고의로 저급한 부품을 사용하거나 조달 시스템의 맹점을 악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이른바 '제도 잠탈의 의도'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악의적인 불량업자와 선의의 피해자를 동일한 잣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법원의 시각이었습니다.


셋째, 앞서 중결함 쟁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품에 설령 아주 미세한 수치상의 하자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정도가 결코 무겁지 않아 수요기관이 본래의 목적대로 제품을 사용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넷째, 제재로 인해 기업이 입게 될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했습니다. 거래정지 처분이 내려지면 단순히 그 기간 동안 조달 쇼핑몰에서 물건을 팔지 못하는 경제적 손실에 그치지 않습니다. 거래정지라는 주홍글씨가 기록으로 남아, 향후 다수공급자계약을 새롭게 체결하거나 다른 입찰에 참여할 때마다 '계약 체결 거부 사유'가 되거나 '치명적인 감점 사유'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는 곧 건실한 중소기업 하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불이익이었습니다.


다섯째, 이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데에는 조달청의 책임도 적지 않았습니다. 조달청이 계약 체결 단계에서 국가기술표준의 검사 방식 변화와 그에 따른 기준의 변동을 면밀하게 살피고, 이를 계약 내용이나 특약에 세심하게 반영하여 기업에 안내했더라면 이러한 분쟁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정 편의주의에 빠져 제대로 된 계약 관리를 하지 않은 행정청이, 그 책임을 모두 약자인 기업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평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전문검사기관이 설정한 시험 조건의 자의성 문제도 있었습니다. 검사기관은 임의로 급기 풍량을 특정 수치(예: 정격 풍량의 90% 이상 범위 내의 단일 수치)로 고정하여 시험을 강행했습니다. 만약 검사기관이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약간만 풍량을 낮추어 시험을 진행했더라면, 기존의 수치에 비추어 볼 때 제품이 넉넉히 합격 판정을 받았을 가능성도 농후했습니다. 이러한 통제할 수 없는 변수 속에서 나온 단 한 번의 불합격 결과로 기업의 명운을 결정짓는 것은 부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조달사업법에서 거래정지라는 강력한 제도를 둔 근본 취지는 원산지를 속이거나 위조 서류를 제출하는 등의 중대한 범죄적 위법행위를 저지른 자를 시장에서 퇴출시켜 공익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법원은 수치가 미세하게 어긋난 이 사건과 같은 단순한 규격 미달을, 서류 위조와 같은 중대 범죄와 동일선상에 놓고 기업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것은 제도의 본래 목적과 헌법이 보장하는 기업의 영업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위헌적 소지가 있다고 깊이 있게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다각적인 분석을 통해,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이 사건 처분은 피고(조달청)가 달성하고자 하는 공익에 비하여 원고(A사)에게 지나치게 가혹하여 재량권을 일탈하고 남용한 위법이 있다"며 처분을 취소하는 정의로운 판결을 내렸습니다.


쟁점 3. 절차적 권리의 묵살과 자체 검증의 힘

본 사건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업에 대한 행정청의 고압적인 태도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업의 자구 노력이 재판에 미친 영향입니다.

조달 규정에 따르면 기업은 검사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조달청의 승인을 얻어 제3의 기관에서 다시 한번 시험을 받을 수 있는 '확인시험(재시험)' 제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A사는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직후부터 억울함을 토로하며 "시험 방법이 개정 전후로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발생한 착시 현상이니, 제발 개정된 시험방법에 따라 제대로 다시 시험성적서를 제출할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는 의견서를 수차례 조달청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달청은 A사의 절박한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제1심 재판부 역시 A사가 제출했던 과거의 시험 자료들이 동일한 생산 로트(Lot)의 제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달청의 거부가 절차적으로 적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조달청 입장에서는 규정에 얽매여 깐깐하게 절차를 따진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재판부는 비록 확인시험 요건의 엄격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조달청이 행정처분을 내리기 전 사전통지 단계에서부터 A사가 그토록 애타게 재시험 기회를 부탁했음에도 이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행태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는 행정청이 사안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보다는 그저 정해진 엑셀 표의 불합격 칸을 채우고 징계를 내리는 데에만 급급했다는 정황 증거로 작용한 것입니다.

또한 A사는 조달청이 재시험을 거부하자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았습니다. A사는 처분이 내려진 직후, 납품되었던 문제의 제품들을 스스로 회수하여 제3의 국가 공인 전문기관에 맡겨 독자적인 '별건 검사'를 치열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별건 검사의 결과는 조달청의 검사 결과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혹해진 최신 표준의 악조건 하에서도 A사의 제품은 냉방 에너지 효율을 넉넉히 초과 달성하고, 난방 효율 역시 우수하게 측정되었으며, 소음 수치 또한 기준치를 안전하게 통과하여 당당히 '합격' 판정을 받아낸 것입니다.

재판부는 이 별건 검사 결과를 판결문에 명시적으로 인용하며, 조달청의 최초 검사 결과 하나만으로는 이 기계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도저히 단정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억울함을 풀기 위한 기업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증거 수집 노력이 승소를 견인한 빛나는 성과였습니다.


제6장. 행정소송 승소 전략

만약 당신이 운영하는 회사나 당신이 소속된 부서가 조달청으로부터 일방적이고 부당한 품질 불합격 통보를 받고 '사전 거래정지 처분'을 맞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본 판례의 승소 과정을 철저히 분석하여 도출해 낸, 행정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한 4단계 실전 승소 전략을 변호사의 관점에서 제안합니다.

첫째, 행정청의 논리적 모순과 기술적 맹점을 현미경처럼 파헤쳐야 합니다. 행정기관이나 그들이 의뢰하는 외부 검사기관도 완벽하지 않으며 실수를 저지릅니다. 특히 본 사건처럼 국가기술표준(KS)이 중간에 개정되었거나, 시험을 진행하는 매뉴얼 지침이 변경된 과도기적 상황에서는 오류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즉, 행정청이 '시험을 치르는 환경(가혹해진 최신 조건)'과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채점 기준점(과거의 느슨한 스펙)'을 마구잡이로 뒤섞어 평가하는 논리적 비약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변호사와 기업 내부의 엔지니어, 기술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아 검사기관이 발행한 시험성적서를 낱낱이 해부해야 합니다. 기외정압, 온도, 습도, 풍량 등 물리적인 시험 조건이 계약 당시에 회사가 합의했던 베이스라인 조건과 일치하는지, 아니면 일방적으로 행정청에 유리하고 기업에 불리하게 임의로 변경되었는지를 찾아내어 법정에서 그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승소의 열쇠입니다.

둘째, 단순한 수치 미달이 법률상 '중결함'이 아님을 기술적·실무적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조달청의 단속 공무원들은 융통성이 부족한 징계 매뉴얼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효율이 0.1퍼센트만 모자라도 기계적으로 불합격 처리를 하고 중결함 징계를 상신합니다. 하지만 행정소송을 담당하는 판사는 법률의 근본 취지를 묻습니다. 법에서 말하는 '중결함'은 단순히 숫자가 모자란 상태가 아니라, "그 물건의 실용성이 떨어져서 관공서나 학교가 원래 목적대로 사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재판 과정에서 "설령 우리 제품의 효율이 2% 부족하고 소음이 약간 초과했다 하더라도, 이는 극한의 랩(Lab) 테스트 환경에서 발생한 미세한 오차일 뿐, 실제 현장에서 교사나 학생들이 기계를 켜고 맑은 공기를 환기하는 데에는 아무런 심각한 위해나 불편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재판장이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내어 설득해야 합니다. 제품이 '불량품'이 아니라 단지 '기준에 약간 미달한 쓸 만한 제품'이라는 프레임 전환이 필수적입니다.

셋째, '비례의 원칙'을 활용하여 호소와 논리를 결합해야 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회사의 제품에 약간의 하자가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헌법과 행정법은 행정기관이 파리를 잡기 위해 대포를 쏘는 행위, 즉 재량권의 일탈과 남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법원에는 회사의 '착한 이력서'를 풍성하게 제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백 건의 공공조달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며 단 한 번의 클레임도 받지 않은 우수한 강소기업이라는 점, 원가를 깎아먹기 위해 일부러 저질 부품을 사용한 악의적 범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조달청의 단 1개월 거래정지 처분으로 인해 회사에 당장 수십억 원의 막대한 매출 손실이 발생하고, 수십 명의 성실한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며, 향후 조달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하고 참혹한 피해의 규모'를 객관적인 수치와 도표로 시각화하여 재판부의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재판부 역시 기계적인 징계로 인해 성실하게 땀 흘리는 중소기업이 억울하게 도산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므로, 이 논리적이고도 감성적인 호소가 판결문을 쓰는 판사의 펜 끝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됩니다.

넷째, 가만히 앉아 처분을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으로 '별건 검사'를 진행하여 유리한 반박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행정청이 매몰차게 재시험 요구를 묵살한다고 해서 절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법정에서는 백 번의 말보다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증거 문서 한 장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위기를 감지한 즉시, 문제가 된 현장에 달려가 해당 납품 물건이나 동일한 생산 로트의 시료를 신속하게 회수하십시오. 그리고 조달청과 관계없는 제3의 국가 공인 시험기관에 독자적으로 검사를 의뢰하십시오. 조달청이 들이댄 그 깐깐하고 가혹한 새로운 기준 하에서도 "우리 제품은 조금만 세팅을 조절하거나 제대로 된 환경에서 테스트하면 충분히 합격점을 받는다"는 완전히 새로운 '합격 시험성적서'를 받아내야 합니다. 본 사건의 A사처럼 이를 재판부에 들이밀 때, "우리 제품은 본래 훌륭한데 조달청의 첫 번째 검사가 억지스럽고 자의적이었다"는 주장이 비로소 완벽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제7장. 기업 실무자를 위한 시사점

치열한 소송전 끝에 기적처럼 승리하여 회사를 살려내는 것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지만, 현실에서 가장 현명하고 이상적인 결과는 애초에 조달청으로부터 거래정지를 당할 틈을 주지 않는 철저한 예방입니다. 공공조달 업무를 책임지는 기업의 임원과 실무 담당자들은 본 판례가 남긴 뼈아픈 교훈 세 가지를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첫째, 국가 인증 기준(KS 등)의 제·개정 동향을 실시간으로 추적 감시하십시오. 기술 발전의 속도에 맞춰 국가의 기술 표준이나 인증 요건은 수시로 그리고 은밀하게 변합니다. 실무자들이 기존에 조달청과 맺어둔 다수공급자계약을 무심코 연장하거나, 단가 인상을 위해 수정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서 구석에 적힌 "개정된 최신 표준을 따른다"는 조항에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는 순간, 회사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법적 의무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게 됩니다. 표준이 가혹하게 개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즉시 사내의 R&D 부서나 생산 팀과 비상 회의를 소집하여 우리 회사의 기존 제품이 그 높아진 허들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지 자체적인 사전 시뮬레이션을 거쳐야 합니다. 만약 통과가 간당간당하거나 아예 불가능하다면, 무작정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것이 아니라 조달청에 선제적으로 연락하여 제품의 사양 변경을 통보하거나, 양해를 구하는 특약을 체결하거나, 아예 완전히 새롭게 세팅된 합격 시험성적서를 미리 준비하여 첨부함으로써 훗날 닥칠 재앙의 씨앗을 계약 단계에서 완벽하게 뽑아내야 합니다.

둘째, 억울한 불합격 통보를 받는 즉시 공식적이고 완벽한 요건을 갖추어 '확인시험'을 제기하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조달청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품질 불합격 통보를 받게 되면, 많은 실무자들이 당황한 나머지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과거에 아무렇게나 보관해 두었던 연관성 떨어지는 시험 자료들을 허둥지둥 끌어모아 이의신청서에 첨부하여 제출하곤 합니다. 하지만 본 판례의 제1심 결과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행정청의 규정은 자비가 없습니다. 규정은 명확히 "동일한 생산 단위(Lot)의 제품에서 채취한 시료에 대한 타 공인기관의 시험 결과" 등 아주 바늘구멍 같은 엄격한 요건을 완벽히 갖추었을 때만 재시험의 기회를 줍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평소 납품 관리가 중요합니다. 조달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할 때마다, 혹시 모를 불합격 사태나 분쟁에 대비하여 동일한 로트 번호가 찍힌 여분의 시료(샘플)를 봉인하여 자체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해 두는 품질 관리 프로세스를 반드시 구축해야 합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이 봉인된 시료야말로 회사를 살리는 유일한 동아줄이 됩니다.

셋째, 막강한 권한을 가진 행정기관의 제재에 지레 겁을 먹고 부당함을 감수하지 마십시오. 현장의 수많은 중소기업 대표님들은 "국가기관인 조달청을 상대로 감히 행정소송을 걸었다가 이른바 '괘심죄'에 걸려 영영 관급 시장에서 쫓겨나면 어떡하느냐"는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부당한 거래정지 징계를 그대로 수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한번 회사에 쌓인 징계 기록과 벌점은 두고두고 회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됩니다. 항소심 고등법원 재판부의 따끔한 일침에서 보셨듯이,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행정청의 처분이 늘 성역처럼 완벽하고 오류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의적이고 불합리한 잣대, 파리를 잡으려 대포를 쏘는 무리한 징계 처분에 대해서는 용기를 내어 맞서 싸워야 합니다. 경험이 풍부하고 행정청의 생리를 잘 아는 법률 전문가의 조력을 받아 팩트와 논리로 무장하여 사법부의 문을 두드린다면, '법원'은 결코 부당한 국가 권력으로부터 억울하게 위기에 몰린 선량한 기업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내 및 책임제한 고지

이 글은 특정 사안에 대한 확정적이고 법률적인 효력이 있는 자문이나 유권 해석을 위하여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계약 내용, 시험 수치, 위반의 정도 등)에 따라 법원의 판단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며, 본 판례 이후 새로운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거나 조달 관련 법령이 개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임의로 취한 법적 조치로 인해 발생하는 직·간접적인 손해나 불이익에 대하여 작성자는 어떠한 법적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거래정지 등 중대한 행정 처분의 위기에 직면한 경우, 즉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관련 분야 경험이 풍부한 법률 전문가와 상담하시어 맞춤형 대응 전략을 수립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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