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역 3년"을 뒤집은 "숫자 10자리"의 마법 (대법원 2004도1564 심층 분석)
- barristers0
- 7일 전
- 3분 분량

수출입 현장에서 서류 한 장, 숫자 하나의 차이는 때로는 '행정 착오'로 끝나지만, 때로는 '구속 수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중고 자동차 수출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연식 조작' 행위가 관세법상 '밀수출'이라는 중범죄로 다스려질 뻔했다가, 대법원의 법리적 결단으로 그 운명이 뒤바뀐 드라마틱한 사건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 사건은 '물품의 동일성(Identity)'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세운 중요한 판례입니다. 1심의 실형 선고부터 대법원의 파기환송까지, 치열했던 법정 공방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1. 사건의 재구성: "헌 차 줄게, 새 차 서류 다오"
피고인들은 중고차 수출업자들입니다. 이들은 오래된 화물차나 건설기계를 매입한 뒤, 마치 연식이 좋은 최신형 차량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베트남 등지로 수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죄 패키지'가 완성됩니다.
문서 위조: 자동차말소사실증명서, 폐차입고확인서 등을 정교하게 변조합니다.
차량 변조: 차대번호를 갈아내고 새로 새겨 넣습니다(일명 '라벨 갈이').
세관 신고: 위조된 정보를 바탕으로 세관에 수출 신고를 합니다.
"신고한 건 A(신형), 나가는 건 B(구형)."검찰은 이를 두고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신고한 물품과 전혀 '다른 물품'을 수출했으니 이는 밀수출이다"라며 관세법 제269조를 적용해 기소했습니다.
2. 재판의 흐름: 유죄와 무죄 사이의 줄타기
(1) 1심의 철퇴: "이것은 명백한 밀수다" (부산지법 2002고단3775)
1심 법원은 피고인들의 행위를 엄중하게 꾸짖었습니다.
판단: 제조회사, 차종, 연식, 톤수 등 물리적 규격이 다르다면 그것은 '다른 물품'이다.
결과: 주범 A에게 징역 3년의 실형과 16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했습니다. 문서 위조의 규모가 크고, 불법 차량을 세탁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아 엄벌에 처한 것입니다.
(2) 2심의 관용: "죄는 인정하지만, 봐준다" (부산지법 2003노1958)
피고인들은 "차대번호만 다를 뿐, 같은 굴삭기 아니냐"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판단: 법리는 1심과 같았습니다. 여전히 규격이 다르니 '밀수출'이 맞다고 보았습니다.
결과: 다만, 피고인들의 사정을 참작하여 집행유예로 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전과자'라는 낙인과 '밀수범'이라는 꼬리표는 여전했습니다.
(3) 대법원의 반전: "HS Code가 같다면 같은 물품이다" (대법원 2004도1564)
여기서 대법원이 등장하여 판을 뒤집습니다. 관세행정의 본질을 꿰뚫는 판결이 나옵니다.
대법원의 논리: 수출은 수입과 달리 관세 징수가 목적이 아니다. 수출 통관의 핵심은 '통계'와 '요건 확인'이다.
핵심 기준: 눈에 보이는 모양(연식, 제조사)이 달라도, 관세행정의 주민등록번호라 할 수 있는 'HSK(관세·통계통합품목분류표) 10단위 코드'가 같다면, 이는 법적으로 '동일한 물품'으로 봐야 한다.
결론: HS Code가 같다면 '밀수출죄(징역형 위주)'는 성립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허위신고죄 정도가 될 뿐이다.)
파기환송!
3. 핵심 쟁점 정리: 무엇이 운명을 갈랐나?
이 사건의 승패는 "다르다(Different)"라는 단어의 해석 차이에서 왔습니다.
구분 | 1·2심 (물리적 관점) | 대법원 (규범적 관점) |
판단 기준 | 제조사, 모델, 연식, 톤수 등 눈에 보이는 스펙 | HSK 10단위 분류코드 (관세행정상의 분류) |
논리 | 스펙이 다르니 다른 물품이다. | 코드가 같으면 통계/요건확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
죄명 | 밀수출죄 (중범죄) | 밀수출죄 무죄 (허위신고죄 검토 대상) |
[변호사의 한마디]
대법원은 '다른 물품'의 범위를 좁게 해석함으로써, 형벌권의 남용을 막고 수출 행정의 특수성을 반영했습니다. 이는 형사법의 대원칙인 '엄격 해석의 원칙'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4. 소송 전략: 만약 이 사건을 다시 맡는다면?
제가 변호인이었다면, 그리고 검사였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풀었을까요? 실무적 관점에서의 전략입니다.
🛡️ 변호인의 전략 (방어)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HS Code 일치 입증)
감각적인 '스펙 차이' 논쟁을 피하고, 철저하게 HS Code 싸움으로 끌고 갑니다. 관세사나 분류 전문가의 의견서를 통해 "이 굴삭기와 저 굴삭기는 관세법상 같은 번호를 쓴다"는 점을 입증합니다.
"죄명의 변경" (Plan B)
문서 위조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전략적으로 "문서 위조는 인정하되, 관세법상 밀수출은 아니다"라고 분리 대응합니다. 밀수출(징역형 가능성 높음)에서 허위신고(과태료나 벌금)로 죄명을 낮추는 데 주력합니다.
추징금 방어
밀수출이 무죄가 되면 16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추징금도 함께 날아갑니다. 이 부분을 집중 공략하여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합니다.
⚔️ 검사의 전략 (공격)
"코드가 다른지부터 찾는다"
HS Code 10자리가 조금이라도 다른 부분을 찾아냅니다.
예를 들어, 톤수에 따라 코드가 세분화되어 있다면 그 틈을 파고들어 '다른 물품'임을 입증합니다.
예비적 공소장 변경
대법원 판례를 의식하여, 처음부터 '밀수출'뿐만 아니라 '허위신고죄'나 '부정수출죄' 등을 예비적 죄명으로 추가해 둡니다. "밀수가 안 되면 허위신고로라도 처벌하겠다"는 그물망 식 기소 전략입니다.
문서범죄의 엄벌 강조
관세법 위반이 약해지더라도, 조직적인 문서 위조 행위의 악질성을 부각하여 양형(형량)을 유지하려 할 것입니다.
5. 시사점: 리스크 관리의 핵심
이 판례는 무역업계와 법조계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수출입의 기준는 'HS Code'다:
물건의 생김새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물건에 부여된 10자리 숫자입니다. 이 코드가 형사 처벌의 유무죄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문서 관리는 생명이다:
비록 이 사건에서 밀수출은 무죄 취지 판결을 받았지만, 공문서/사문서 위조죄는 그대로 유죄입니다. 통관의 편의를 위해 서류를 손대는 순간, 관세법이 아니더라도 형법의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대량 사건의 위험성:
수백 건의 위조와 수출이 결합된 사건은, 하나의 법리 판단이 바뀌면 전체 판결이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 초기 대응 단계에서부터 치밀한 법리 검토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판례분석] 억울한 세관 벌금 통지서, 왜 ‘행정소송’으로 다툴 수 없을까?— 관세법상 ‘통고처분’의 특수성과 헌법재판소의 결정(96헌바4)을 중심으로](https://static.wixstatic.com/media/b1f6e4_a45b8860f7d24e979238639e295dd9f4~mv2.png/v1/fill/w_669,h_664,al_c,q_90,enc_avif,quality_auto/b1f6e4_a45b8860f7d24e979238639e295dd9f4~mv2.png)

